[공지] 풍월당 신간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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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풍월당 작성일19-07-11 13:07 조회3,5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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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피아니스트만이,

그 중에서도 알렉상드르 타로만이 전해줄 수 있는 이야기


-미셸 슈나이더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관해 쓴 책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의 본문은 글렌 굴드가 마지막 실황 공연을 한 날의 호텔방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그 조용한 방에서 굴드는 음악에 관한 상념에 잠긴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도입부는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것이다. 굴드는 자신이 왜 공연을 그만두고 녹음에만 집중하기로 했는지에 대해 많은 글을 썼고 음성 인터뷰까지 남겼지만, 그 마지막 공연이 있었던 날 밤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록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의 굴드는 독백을 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걸 들은 적이 없고, 기록에 남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굴드의 가장 내밀한 공간은 비밀로 남겨졌고, 후세의 작가들은 그 공간을 ‘창작’할 수밖에 없었다.


피아니스트들의 내면은 여전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작가들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피아니스트들은 그 내면을 충분히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열렬히 글을 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글솜씨가 좋은 피아니스트들은 여러 명 있지만, 그 솜씨를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데 사용한 이는 없었다. 혹은 충분히 성공적이지 못했다.


알렉상드르 타로는 이 어려운 작업을 성공적으로 해낸 최초의 피아니스트일 것이다. 공연 직전, 대기실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타인’으로 인식하면서 시작되는 그의 에세이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는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직접 써내려간 이야기다. 그래서 그는 피아노 혹은 피아니스트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자신의 꿈과 몸을 언급한다. 어릴 때부터 겪었던 불면증이 남긴 흔적들이 묘사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복용해 온 알약들의 이름이 마치 시처럼 이어진다.


아르젠툼 니트리쿰은 시간에게 시간을 내주고, 눅스 보미카는 여름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브리오니아는 겨울로부터 보호해준다. 에파르 술푸리쿰은 폭풍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주고, 스트라모니움은 밤의 악령들로부터 멀어지게 해준다. 아룸 트리필룸은 말에 실체를 부여해주고, 이리스 베르시콜로르는 말의 무게를 덜어준다. (20~21쪽)


이러한 시적인 묘사들은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의 이곳저곳에서 아름답게 빛난다. 무명 시절의 타로가 오르세 미술관 지하에서 무성영화에 반주를 했던 에피소드는 환상적인 단편 소설처럼 느껴지고, 세상을 떠난 피아노 선생님의 장례식에서 그가 읽은 추도사는 작은 시처럼 책 속에 삽입돼 있다. 가족을 위해 바리톤 가수의 길을 포기하고 자동차 정비사가 된 아버지가 혼자 방 안에서 부르는 오페라 아리아는 짧고도 애수 어린 문장들을 통해 전달되며, 야외 공연을 마치고 분장실에서 나왔을 때 저 멀리에서 하얀 고래를 본 이야기는 마치 꿈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유머도 있다. 공연 중에 들려 오는 기침 소리를 분석하고 분류할 때의 타로는 ‘우아한 유머’가 뭔지 제대로 보여준다.


이 시적인 순간들은 결국 타로가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겪고 관찰한 일들, 즉 그가 살아가는 세계에 관한 묘사로 확대된다. 일류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들이 가득하다. 타로는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개성적이고도 아름다운 공연장들이나 공연이 끝난 뒤의 박수 소리와 닮은 소리를 내는 자갈들이 있는 작은 해변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들을 소개한다. 동시에 그는 과거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조상을 찾듯이 피아노라는 악기의 역사와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의 역사를 언급하며, 이를 통해 피아니스트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를 추적한다. 이 성찰은 간략하고도 핵심적이다. 타로는 피아니스트가 태어난 지점을 살피면서 거기서 일종의 기원을, 본질을 추출해낸다. 그에 따르면 독주 피아니스트는 고독과 노래 속에서 태어난 존재다. 가수를 흉내 내면서 홀로 무대에서 노래했던 19세기의 손가락들. 타로는 이 기원에서 자기 삶의 모토를 추출한다. 한쪽에는 고독과 격리가 있고, 맞은편에는 흥분과 탐구가 있다.


이렇게 한 개인의 편력과 피아노 음악의 역사, 세계의 다양한 장소들과 몰개성한 호텔방들을 한데 담은 이 책은 확고한 주제의식 속에서 하나의 이야기처럼 줄곧 이어진다. 그 주제란 바로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삶이다. 타로는 단순한 자기 삶의 편력이 아니라 다양한 소재들을 자유롭게 이어 나감으로써 훨씬 풍부한 사색을 담은 에세이를 창조했다. 이는 거의 수필의 전범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타로는 이 모든 것을 짧은 이야기들의 묶음 속에 담았다. 거울 속의 이미지에서 시작해 꿈속의 이야기로 끝나는 이 작고도 다채로운 에세이는 피아니스트의 내면을 가장 풍부하게 담아낸 기록 중 하나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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