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사랑하는 바흐 1집
지금 흐르는 음악- bach/ sicilano in g minor (from flute sonata, BWV1031)
연주 : Tatiana nikolayeva,piano
작년 조선일보 "일사일언"에 썼던 원본글입니다.
이 음반을 듣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함께 올려봅니다.
블랙커피의 추억
2007년 조선일보 일사일언 - 글: 최성은
그녀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한다.
해운대 동백섬에 짙은 자주색의 동백꽃들이 쑥스럽게 고개를 내미는 늦가을로 기억된다.
아직은 이른 듯 한 검정 겨울코트를 입은 아가씨가 매장으로 들어왔다.
두 손은 검정 장갑으로 가려져 있었다.
피아노음악들이 진열된 곳에서 열심히 음반을 고르고 있는 그녀에게 커피 한 잔을 권했다.
그녀는 블랙으로 달라고 짧게 대답했다.
매장 직원들과 손님들은 그녀의 옷차림에 자꾸만 시선을 돌렸다.
종이컵에 담긴 자판기 블랙 커피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는데 그녀는 장갑을 낀 채 두 손으로 커피를 건네 받았다. 그런데 커피를 건네 받는 그녀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커피를 주고 돌아서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커피를 음반 위에 쏟은 채 그녀는 심하게 당황해 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녀는 같은 옷차림으로 여러 차례 매장을 찾아 왔다.
올 때 마다 피아노 음반만 많이 구입했으며, 항상 블랙 커피를 마셨다.
그때 마다 떨리는 그녀의 손으로 인해 종이컵은 늘 불안해 보였다.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그녀는 세련된 이미지 보다는 단아하고 깔끔한 인상 이였고 하얀 얼굴에 경직된 두 손과 희미하게 흩어지는 눈물 사이로 짙은 외로움이 보였다.
그녀의 방문이 잦아지기 시작한 어느 날 나는 그녀를 위해 큰 머그잔을 하나 구입해서 매장에 가져다 놓았다.
수전증이 심한 그녀를 위해 좀 더 안정된 컵을 준비한 것이다.
그녀는 한 참 교향곡에 빠져있던 나에게 피아노 독주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었고, 피아니스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까지 전해주며 (나를) 피아노 음반에 더욱 심취하게 했다.
그러던 중 나는 그녀가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녀는 손 치료와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녀가 떠나고 일주일쯤 지났을까…. 소포 하나가 도착했다.
거기엔 러시아 피아니스트를 너무도 좋아하던 그녀가 보낸 두 장의 음반과 함께 떨리는 손으로 쓴 듯한 짧은 쪽지가 있었다.
"당신이 커피를 담아준 그 큰 머그잔은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그 날 나는 검정 장갑 속에 가려진 하얀 손으로 피아노 치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녀가 선물한 티티아나 니꼴라예바가 연주하는 바흐와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가 연주하는 슈베르트 음반을 종일 들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블랙 커피를 마시면서…
어쩌면 그녀는 그토록 원하던 어느 음악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그 날의 추억을 이야기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은 떨리지 않는 두 손으로 블랙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감싸쥔 채로 ...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